국내외적으로 지금 세계는 난세다. 이 혼미한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가히 기적이다. 그만큼 중심이 되어줄 정신적 좌표가 심각하게 무너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2024 갑진년 새해의 혜안을 논어에서 찾으려 했다.
평소 자주 읽는 고전이긴 하지만, 올해 들어 다시 책을 잡았다. 읽을 때마다 늘 새롭고 깨달음의 연속이다. 2500년전 20장 11,500글자로 구성된 고전이 지금은 중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교양 필독서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등 모든 영역에서 인간들의 표상을 정위치에서 잡아주는 것이 논어의 위력이고 존재 이유다.
본디 공자는 ”生而之知(생이지지)하여 吾小也賤(오소야천), 故(고) 多能(다능)이라“했다. 나면서 아는 것은, 소인은 본래 비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다재다능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공자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따라서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인간들의 紋樣(문양)을 바르게 제시하는 삶의 지침이 되었다.
논어에서 107번이나 언급하고 있는 단어가 君子(군자)다. 여기서 군자라 함은 삶의 표본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교양과 품격을 갖춘 인간상을 말한다. 의지만 있으면 온갖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며 새로운 가치와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학습자이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이 시대가 원하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추구해야 할 유형별 군자의 인간상을 정리했다.
첫째는, 學習型(학습형) 인간이다.
논어의 첫 구절에 ”學而時習之하면 不亦說乎아라.“했다. 인간은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에서 時習이라는 의미는 배움의 완성은 곧 학습이기 때문에 공자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학습의 위력은 위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同志型(동지형) 인간이다.
논어의 두 번째 구절에 ”有朋而自遠方來하면, 不亦樂乎아라.“했다. 뜻을 같이하고 지향점이 같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니겠는가?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 라는 의미다.
세 번째는, 獨立型(독립형) 인간이다.
논어의 세 번째 구절에 ”人不知 不慍이면 不亦君乎아라.“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소신껏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온갖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네의 모습을 질타하는 구절이다.
네 번째로는, 親和型(친화형) 인간이다.
”周而不比(주이불비)해라”했다. 친밀하게 지내되 부정하게 살지 마라.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내면서 비굴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수록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서로 상생하며 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는, 包容型(포용형) 인간이다.
“和而不同(화이부동)이라”했다. 화합하되 붙어 다니진 않는다는 뜻으로, 붙어 다니되 화합하지 못하는 同而不和(동이불화)의 반대말이다. 공자는 논어의 자로편에서 “군자는 和而不同하고 소인은 同而不和 한다”고 했다. 사람과 생각을 같이하지 않지만, 이들과 화목할 수 있는 군자의 세계를 말한다.
여섯 번째는, 統攝型(통섭형) 인간이다.
공자는 “君子不器(군자불기)라”했다.
이는 군자가 그릇처럼 한가지 도 또는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여러 가지 재능과 학문을 바탕으로 덕성을 발휘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일곱 번째는, 實踐型(실천형) 인간이다.
적어도 군자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으니 남에게 미루지 말라”고 했듯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남도 먹고 싶은 법이니 나눠 먹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자리는 남도 원하므로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은 현장에서 요구하는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는 leadership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여덟 번째는, 責任型(책임형) 인간이다.
맹자에“ 行有不得反求諸己(행유부득반구제기)이라” 했다.
행동을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지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들어보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은 모든 것은 자신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名分型(명분형) 인간이다.
이는 先義後利(선의후리)의 정신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의를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無信不立(무신불립)이라”했다.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논어의 안연편에서 비롯되었다. 즉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필이면 나는 왜 지금 논어를 읽는가? 사는 것이 무엇이길래? 인간과 정치, 인간과 교육 그리고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으면 싶을수록 그 많은 고전 중에서 논어가 단연 손 꼽이는 것은, 아마도 내가 원하는 고뇌의 해답이 그 책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성 상실, 교육부재, 정치 실종, 지구 파괴, 인간관계 갈등들이 지금 가장 심각한 현안문제이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삶의 올바른 지침과 좌표가 있는 논어의 무한한 진리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영원한 정신적 지주이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행복하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송명석 박사(세종교육연구소장)